날적이

100104 월요일, 폭설

오후3시 2010. 1. 4. 14:09


_망할 눈이 소리도 없이 처 내렸다. 비오는 소리야 어떻게 듣기는 하는데 어둑한데다 밖은 고요하고, 눈 쓰는 소리도 안 나서 현관까지 나왔다가 다시 계단을 튀어 올라갔다. 발목을 덮게 쌓인 눈에 허걱, 하기도 전에 그 만큼 쌓일 기세로 눈이 내리고 있어서 출근길 걱정도 하기는 했지만 계란 한판을 눈 앞둔 남쪽 지방 출신 기집애는 사실 좀, 신이났다.

_평소와 같은 시간에 출근했는데 1시간 늦게 사무실에 도착했다. 눈 앞에서 세대를 보내고 교대에서 사람들에 떠밀려 내렸다가 십오분에 한대씩 오는 차량 두대를 또 보내고, 승강장 사이에 낄뻔하다가, 짜부된 채로 지하철을 타고 왔다. 사람이 넘쳐 김이 서리기 시작한 스크린 도어 앞에서 당장 부장님께 전화해 "저 한시간만 늦게 출근 할게요"를 맘 속으로 열번 연습하다가 드디어 전화기를 꺼내들려고 한 순간 차량이 들어온다는 소리가 띠리리 울렸다. 인생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행동에 옮기는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네. 그런데 나 좀, 나이 먹더니 뻔뻔해지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2년 전에 이렇게 눈이 와서 버스에서 꽁꽁 발이 묶였을 때의 나는 전화하기도 겁이나서 시계만 연신 들여다 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지각이라는게 내 인생의 출석표에 아주 큰 스크라치를 남길 것처럼 간이며 심장이 오그라들었는데 오늘 아침 나는 너무 당당했다. 지하철 안에서 짜부되면서도.

_삼성역에 사람들이 또 우르르 내려서 또 우르르 끌려 승강장에 떠밀려 나갔다가 다시 타고 나니 지하철 안이 좀 서 있을 만 한 상태가 되서 시간을 확인하니 9시 5분. 하, 이 어정쩡한 시간은 뭔가요. 한숨을 쉰 뒤에 전화기를 꺼내들고 부장님께 전화했다. "부장님, 전데요. 저 지금 삼성역이예요.(웃음)" 그런데 어쩌라는 설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말했더니 천천히 오랜다. 아, 우리 회사 원래 이랬지. 김대리 때문에 월초와 월말은 꼭 이직을 한번씩 고려해 보게 되는데 이런 물렁한 데가 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이럴땐 그래도 좋다. 내가 평소보다 한시간 늦었으니 다른 놈들은 두시간 늦겠구나 하고 사무실에 들어왔더니 사무실이 엎어지면 코닿을 데에 있는 잠실러 사장님과 부장님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뿐, 다들 출장크리. 왠지 분한 기분이 든다. 이런 때에는 두시간을 늦어야 하는건데! 복도 없지!! 

_출근 시간이 9시인데, 1년 2개월을 꼬박 8시 30분에 출근하고, 더러는 가끔 8시 10분에도 출근하고, 7월 17일이 더 이상 공휴일이 아니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핸드폰이 나를 배신해서 모닝콜을 울리지 않는 바람에 하루 지각한 거 말고는 제법 성실하게 학교.. 아니 직장에 출근을 하고 있는데, 다른 놈들은 9시 10분에 오고, 더러는 30분 더러는 두시간 늦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서 작년 가을을 기점으로 좀, 뭣하러 이 지럴을 하고 사는 가 싶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전기장판에 이불 속도 따숩겠다 겨울이 되고는 계속 8시 40분 출근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지하철에 짜부가 되면서도 아, 난 왜 이런날 마음놓고 지각도 못하나, 이렇게 훌륭한 지각 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_9시 10분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려고 보니 뭥미 스러워서 걸었다. 차도도, 인도도 온통 눈밭에, 아직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눈들이 나무 위에 그대로 소복히 쌓여있었다. 이 때다 싶어서 디카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는데 액정엔 제대로 나오더니 옮기면 어떨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사진들을 몇장 찍어놓고 걷다보니 저 반대편에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왠지 모를 동지감,을 느끼면서 지나쳐왔다.

_사무실 있는 골목을 들어서며, 동네 아줌마가 눈을 쓸고 있는 아저씨랑 나누는 말이 "이런 때 좋아하는건 애들이랑 강아지 밖에 없다"는 말에 좀 상처를 받고, 사무실에 들어선 게 9시 30분. 평소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데 사진 찍으며 걷느라 느적느적 걸은 걸 제외하곤 평소와 다름 없는 거리였다.

_지하철에서 오늘 죽을 뻔 했으니 퇴근은 좀 일찍 할 것 같은데, 과연 일찍 한다고 해도 집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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