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100208 주말 춘천

오후3시 2010. 2. 8. 11:22

_주말 내내 이불 위에서 하이킥을 날렸다. 지난 주는 김대리때문에 열받아서 앓아 누웠고(깨끗이 잊어버리고 싶지만 난 아직도 분하고 원통해. 그 얘길 누군가에게 할라치면 입술부터 바짝 마른다. 아오, 성질나!) 이번 주는 회사 막내 때문이다. 이 개념없는 새끼. 아오.. 날 하이킥을 날리게 만들다니. 거기에 팔자에 없는 유부남과 데이트를 하고, 난 지금 손발이 오글거린다. 주말에 오그라든 손발이 펴지지 않아서 이걸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는 속병날 것 같아서 월요일 아침부터 포스팅에 공을 들인다. (이 모든 원흉인 막내가 손발을 싹싹 빌지도 않고 완전 쌍큼하게 뭐 그 따위 것 가지고 하이킥을 하고 앉아 있냐 한심한 얼굴로 '미안해요' 하고 내 자리를 지나갔기 때문도 아니다. 아, 난 토요일의 분노가 다시 되살아 났어.)

_금요일에 밥먹다가 부장님이 춘천에 닭갈비 먹으러 가지 않을래, 하고 말을 꺼냈다. 작년부터 우리 회사에서 부장님과 나를 주축으로 '맛집투어'를 하자고 분당에 오리고기 집이며, 여러군데 장소를 물색했지만 번번히 막내 자식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엔 꼭 가자, 하고 얼른 시간을 맞췄다. 부장님은 오후에 돌잔치가 있고, 막내도 저녁 약속이 있었고, 나도 다들 저녁 약속이 있다 해서 일요일에 만나도 될 걸 굳이 토요일 저녁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사무실 앞에서 만나기로 한게 10시. 춘천에서 닭갈비만 먹고 오는 호사스런 투어를 계획하고 나는 좀 들떴다. 차도 없는 뚜벅이 인생, 간만에 시외 외출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음날 아침 10시, 나의 설레임은 잠실 사거리에 무참히 버려져 개차반이 되었고, 막내한테 백번 전화를 했지만 백번 전화를 받지 않았다.

_화장까지 처발처발 하고 왔는데 약속이 어그러지자 속이 상해 30분을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예정대로 고고씽을 외쳤다. 약속이 어그러지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부장님과 이 새끼를 죽이네 살리네 양껏 씹어놓고 나니, 회사 차를 타고 부장님과 여직원이 단둘이 토요일 오전에 춘천행이라니. 둘다 급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부장님이 먼저 "이걸 마누라한테 뭐라고 얘기하나 ㅜ0ㅜ" 였고, "전 무슨 죄예요 뉴뉴. 남친없는 것도 서러운데!" 라고 공기는 급 냉각상태. 아오 이걸 하이킥을 할 수도 없고, 나 왜 그냥 가자고 했니, 닭갈비가 그렇게 먹고 싶었냐, 바보 멍충아, 이 놈의 입방정 귀를 틀어막고 발을 동동거려 보지만, 차를 돌리기엔 이미 고속도로 위였다.

_갈 때는 뻥뚫린 춘천 고속도로를 타고, 부장님에게 전에도 골백번은 들은 것 같은 옛날 여자친구 자랑이랑을 마치 처음 듣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개소릴 해댄것 같은데 나 지금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하이킥은 물론이고, 이건 아오, 어떻게 다른데서 말하면 진짜, 아오!!! 아오!!! 미쳐머비러ㅏㅓㅏㅓ아너하멍나허마ㅓ아넣 세상ㅇ너ㅣㅓ 나 왜 그런 얘길 한거니. 술도 안 처먹고 그런 소릴 지껄이다니 이 멍충아 아오!! 이 머저리 아메바!!! 유글레나 ㅠㅠㅠㅠㅠ 아고허ㅏ머아너 ㅎ아노몽너ㅏㅎ마ㅎㅓ어나허 아오!!! 왜 그런 멍청한 소릴한거야. 그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거라고, 사람한테, 그게 말이라는걸 이해하는 생물에게는 해서는 안되는 말인데, 그게 엄청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런 아오!!! 그걸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청 대단한 얘기거나, 라디오에서 깔깔댈 것 같은 엄청 웃긴 에피소드 같은 것도 아닌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허세같은거 쭉 빼고 아 이건, 아부지한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끄러운 얘긴데, 톡 까놓고, 남들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나 자신한테는 엄청 부끄러운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이 불편한 침묵을 깨고자, 나불나불 떠들었다는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창피한거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무 것도 아닐 얘기지만, 나 혼자는 부끄러워 하고 수치스러워하고 남들은 다 모르지만 서랍 속에 꽁꽁 넣어두고 자물쇠로 잠궈놓고 혼자 되거나, 외롭거나 쓸쓸해질 때 나만 꺼내보는 그런 얘기들을, 그다지 청자로 적합하지 않은 부장님께 나불거린거냐!!! 내가 이렇게 이성을 홀랑 무슨무슨 댐에다가 정줄을 놓아버린 게 다 술먹고 뻗어서 다시 서울에 도착할 때 까지 문자는 커녕 전화조차 하지 않았던 막내의 개념머리 없음에 다 퍼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일종의 현실도피처럼? 실제로도 1차적인 원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 놈에게 있는 것이고.

_아무튼 이, 정말 팔자에 없는 유부남과의 데이트 코스는 춘천의 호반 닭갈비를 지나, 가평의 캠핑장을 돌아, 눈물로 쁘띠프랑스를 지나치고, (원래는 둘다 들릴 예정이었는데 뭐냐, 이 불편한 관계, 부장님과 여직원 주말에 회사 차로 데이트 같은 이, 불경한 관계, 누구한테 뭐라고 설명해도 떳떳하지 않은 이 지랄스럽기도, 웃기기도 슬프기도 한 처지.) "너도 곧 차 있는 남친이 생기면 여길 지겹게 오게 될 거"라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받으면서 눈물을 쥘쥘 흘렸다. 그런데 현실은 시궁창. 그래, 바로 이런 상황이야. 현실은 시궁창. 드라이브는 나름, 드라이브인데 이게 뭐 즐겁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심지어 설레이지도 않고 헛소리나 질질 하고 있고. 하이킥은 날리고 있고. 월요일 아침부터 일은 더더더더, 손에 안 잡히고. 커피는 망할 왜 이렇게 써.

_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전무님은 열라 주말에 덕유산 다녀오신 얘기를 씐나게 하고 계신데, 부장님과 나는 한마디 입도 뻥긋 못하고 있다. 이게 뭐냐, 이게 뭐냐고 ㅠㅠㅠㅠㅠㅠㅠㅠ 이게 대체 뭐냐고!!! 아옼. 닭갈비는 처묵고 와서 부담은 백배인 이 멀쩡하고 서러운 주말은 뭐냐고. 

_내 주말을 보상하라.

_그런데 이 막내새끼는 내가 문자며 전화를 한 토요일도 아니고, 일요일도 건너뛰고 고작 월요일 아침에 "미안해요" 한마디다. 아오, 저 새끼를 죽여 살려.

_그 와중에 이사님은 쓸데없는 시비를 걸다 내기에 져서 점심값 내기에 당첨되셨다. (얏호!)

_한동안 닭갈비 생각은 안 날 듯. 미안해요, 춘천. 내 다시 거길 어떻게 가냐. 남친이랑 어떻게 가냐 ㅋㅋㅋㅋㅋㅋ 생겨도 어떻게 가냐 ㅋㅋㅋㅋㅋㅋ 안 생겨요. 안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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